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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金研究会

(천지일보) [시사칼럼] 씨앗 자루를 베고 죽는 마음 (2026.10.22)

2026.10.23

안종일 시사평론가 / 경북보건대학교 교수

농부아사 침궐종자(農夫餓死 枕厥種子).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 자루를 베고 죽는다.

다산 정약용이 <이담속찬(耳談續纂)>에 거두어 둔 우리 속담이다.

보릿고개에 아이가 배고파 울어도 어머니는 볍씨만은 솥에 넣지 않았다. 그 한 줌이 내년 봄의 들판이고, 자식의 자식이 먹을 밥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이 시대의 씨앗 자루다. 국밥 한 그릇 값을 아낀 월급봉투에서, 새벽마다 가게 문을 여는 자영업자의 통장에서, 연금 받을 나이를 셈해 보지도 않은 청년의 첫 월급에서 한 줌씩 떼어 모은 볍씨다.

자루의 주인은 정부도 운용역도 아니다. 지금 연금을 받는 노인과 앞으로 받을 청년,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다. 나머지는 잠시 자루를 맡은 사람일 뿐이다.

장부부터 차분히 펼쳐 보자.

지난해 국민연금은 231조 6000억원을 벌었다. 수익률 18.82%, 기금이 생긴 뒤 최고 성적이었고 한 해 연금 지급액의 4.7배였다.

6월 말에는 수익률이 27.22%, 적립금이 1865조 6000억원까지 불었다. 잔치는 거기까지였다.

7월 한 달 코스피가 22.19% 무너지자 적립금 평가액은 181조원 줄었고, 국내 주식에서만 124조 6000억원이 빠졌다. 수익률도 14.84%로 내려앉았다.

‘181조 증발’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주식을 팔아 손실을 확정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장부에서 줄어든 돈이 허깨비인 것도 아니다.

반대로 연금이 거덜 났다는 말은 더 큰 거짓이다. 지난해부터 올해 7월 말까지 쌓인 수익은 450조원 안팎이다. 10월 15일 코스피가 다시 7.57% 떨어졌지만 공개된 실적은 7월 말에서 멈춰 있다.

무엇을 사고팔았는지도 모르면서 ‘240조 손실’을 외치는 것은 공포를 파는 장사다. 연금개혁만 반영한 정부 추계로도 기금은 2064년까지 버티고, 올해부터는 국가의 지급 보장이 법에 새겨졌다.

그러나 아직 흑자라는 말로 모든 물음을 덮을 수는 없다.

무거운 짐을 진 채 왜 절벽 끝까지 걸어갔는지는 따져 물어야 한다.

연금 운용에는 저울이 있다. 주식이 무거워지면 덜어내고, 가벼워지면 채운다.리밸런싱이라는 낯선 말은 됫박 위로 수북이 솟은 쌀을 잣대로 고르게 깎아 내던 어머니의 손길과 같다.

기금운용위원회는 1월, 그 손길을 6월 말까지 멈췄다. 5월에는 국내 주식 목표 비중마저 14.9%에서 20.8%로 올렸다. 6월 말 국내 주식 비중은 29.1%까지 불어났다.

같은 시기 사학연금과 우정사업본부는 유예하지 않았고, 공무원연금은 한도를 넘자 20영업일 안에 되돌렸다.

예외는 원칙을 지키려고 두는 것이지 원칙을 쉬게 하려고 두는 것이 아니다. 반년이나 이어지고 목표치까지 옮겨 놓은 예외라면 그것은 이미 새 원칙이다.

공단은 유예한 덕분에 오히려 더 벌었다는 추정을 국회에 냈다. 다만 주가와 금리, 환율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단서를 달았다.

모형 하나는 면죄부도, 유죄 판결문도 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진영의 고함이 아니라 같은 자료로 다시 셈해 보는 독립적인 검증이다. 그런데 원자료는 공개되지 않았고, 결정의 전모를 담은 회의록은 2030년에야 열린다고 한다.

국민연금은 코스피의 구명보트가 아니다.

오를 때 덜고 내릴 때 채워 시장이 덜 출렁이는 것은 원칙을 지킨 열매이지 지수를 떠받치라는 임무가 아니다. 주가가 오르면 정책의 훈장이 되고 떨어지면 시장 탓이 되는 순간, 노후자금은 권력의 쌈짓돈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그 의심만으로도 연금은 이미 손해를 본다.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첫째, 운용 원칙을 멈출 때는 언제 꺼내고 언제 거둘지 요건을 미리 규정으로 못 박고, 멈춘 결과는 외부 검증을 거쳐 반드시 공개해야 한다.

둘째, 1월과 5월의 회의록과 시뮬레이션 원자료는 2030년이 아니라 지금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 매매 정보는 가리더라도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 누가 반대했고 위험을 어떻게 따졌는지는 밝혀야 한다.

셋째, 12월 기금위는 넘치는 국내 주식과 목표 23.1%에 못 미치는 국내 채권(7월 말 16.8%)의 균형을 되찾을 길을 숫자로 밝혀야 한다. 정부의 입김은 줄이고 전문가와 가입자 대표의 목소리는 키워야 한다.

넷째, 큰 손실 뒤에도 지급될 수 있는 성과급 구조를 고쳐야 한다. 올해 수익률이 7월 말 수준으로 끝난다면 내년에 17%를 잃어도 약 230억원의 목표성과급이 계산된다는 분석이 나왔다. 지난해 성과급 457억여원 가운데 지급을 미룬 몫은 0.2%뿐이었다. 오래 두고 평가받겠다면 책임도 오래 져야 한다. 상당 부분을 5년 이상 나눠 주고, 큰 손실이 드러나면 돌려받게 해야 한다. 책임 없는 보상은 씨앗을 먹어 치우는 또 다른 이름이다.

매달 25일 연금을 기다리는 노인의 급여가 이번 하락으로 당장 깎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서른 살 가입자에게 연금은 통장 잔고가 아니라 약속이다. 자신이 예순다섯이 되는 날에도 원칙이 살아 있으리라는 믿음 말이다. 주가는 다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한번 샌 믿음은 수익률 몇 퍼센트로 메워지지 않는다.

씨앗 자루를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내일의 주가를 맞히는 재주가 아니다.

함부로 끈을 풀지 않는 절제, 끈을 풀었다면 그 까닭을 밝히는 용기다.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던 농부는 가난했으되 비굴하지 않았다.

오늘의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부유하다. 그런데도 내일의 씨앗을 오늘의 지수와 바꾼다면, 우리는 가난해서가 아니라 경솔해서 봄을 잃은 세대,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가난한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

씨앗은 오늘 배를 채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식의 자식이 맞을 봄을 지키는 일, 국민연금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 하나다.

https://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44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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