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연구회 논평. 전현직 KBS 직원이 평가하는 프랑스 현실) 예견된 침몰, 프랑스와 ‘타이타닉’호 비교해보기. 이정옥 KBS 전 파리특파원 (2026-10-26)

(2026년 10월 25일
연금연구회 홈피
"성명서 및 논평" 카테고리에 올려진
오마이뉴스 기사,
KBS 기사(연금연구회 성명서 포함)와
다음 기사를 비교해 보기 바란다.
KBS 전직 파리 특파원이 쓴 칼럼이다.
최근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프랑스 사태와 관련하여
누가 더 정확하게 보고 판단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세계인들이 동경하던 예술의 도시 파리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인 폭동의 현장으로 변모해 버렸다.
파리뿐 아니라 프랑스 전국 시내 한가운데서 자동차가 불타고, 명품 상점들은 약탈당해 쏟아져 거리에 내팽겨 쳐졌다.
140년 역사의 리모주(Limoges)시청의 첨탑이 불길에 무너져 내리는 사상 초유의 끔찍한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선생님을 보내주세요. 낡은 교실을 고쳐주세요”
이번 시위사태의 발단은 10대 학생들의 절박한 분노의 절규였다.
난방조차 되지 않고 쥐와 벌레가 들끓는 열악한 학교환경을 견디다 못한 학생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이 작은 불씨에 기름을 부은 건 치솟는 물가와 기름값이었다. 생활고로 살기가 팍팍해진 서민층이 합세했고, 이른바 ‘노란조끼 운동’과 강성노조가 개입하면서 시위는 순식간에 전국적인 대규모 폭동으로 확산되었다.
세계 7위의 경제대국 프랑스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빚위에 쌓아 올린 달콤한 복지천국의 환상
프랑스의 국가부채는 해마다 빠르게 늘어나 현재 유럽최고의 수준인 5300조원에 달한다.
과거 유럽 재정 위기의 주범이었던 그리스 부채규모의 10배에 이른다. GDP 대비 부채비율이 약 120%에 육박한다.
매년 내야 하는 이자만 해도 110조원에 달한다.
프랑스정부가 이러한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손을 댄 것은 교육 예산이었다. 정치지도자들은 선거에서 자신에게 표를 던질 표밭의 예산은 건드리지 못하고 투표권이 없는 학생들의 예산부터 깎아버렸고 피해는 온전히 어린 학생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프랑스는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훨씬 많은 나라다.
프랑스 정부예산의 약 30%가 사회복지예산이고 그 절반을 연금이 차지한다.
2차 대전 직후 드골 정부를 거치면서 프랑스는 강력하고 풍요로운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했다.
특히 1980년대 좌파 미테랑 정부는 정년을 기존 65세에서 60세로 앞당겨 연금 받는 인구를 대폭 늘려놓았다.
국가의 금고를 활짝 열어 제친 것이다.
지금 일하는 청년이 낸 세금으로 은퇴한 노인을 부양하는 이른바 부과방식(PAYGO)" 연금제도는 은퇴후 수십년의 안정된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평균수명은 급격히 늘어나는데 연금을 납부할 젊은 노동 인구는 줄어드는 인구구조변화를 예상치 못한 것이 이 제도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 결과 청년 세대가 나이든 세대를 부양하기 위해 부담해야 할 짐이 천문학적으로 점점 늘어났다.
일하는 청년의 실질 임금은 줄어도 은퇴자의 연금 수령액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은퇴자의 생활이 일하는 현직자보다 더 풍요로와지는 역설이 발생했다.
![]() ▲ [파리=AP/뉴시스] 지난 10월18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한 소방관이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발생한 거리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뉴시스 |
‘일찍 은퇴해 삶을 즐겨라’
1980년대 파리연수시절 정년을 낮추어달라고 시위하는 프랑스인들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한적이 있다.
‘더 일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한국인들과 달리 프랑스인들은 오히려 ‘일을 일찍 그만두게 해달라’고 시위를 하다니!
프랑스는 은퇴자에게 각종 세제 혜택을 주기 때문에 일하지 않고 연금 받는 사람의 수입이 일하고 월급을 받는 사람보다 나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안정된 삶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들이 ‘더 잘 일하기 위해 휴식’한다면 프랑스인들은 ‘놀고 즐기기 위해 일’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초복지국가 프랑스가 외친 ‘일찍 은퇴해 삶을 즐겨라’는 달콤한 구호를 반영하는 것이다.
자녀를 낳을때부터 지원되는 육아,보육지원, 자녀수에 따른 세금 감면, 공교육 전액 무료, 동거커플에 대한 지원, 청년층을 비롯한 저소득층 생계지원,
전소득의 70%이상을 보장하는 세계 최고의 연금제도등 프랑스는 가히 유럽 최고 수준의 초 복지 국가라는 평을 들어왔다.
그러나 과거의 풍요로웠던 연금 제도는 오늘날 청년 세대와 국가 재정을 짓누르는 거대한 '빚의 청구서'가 되어 돌아왔다.
프랑스는 1974년 석유 파동 이후 지금까지 5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국가 재정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복지 혜택과 연금을 더 주겠다는 약속을 남발했고, 국민들은 그 달콤함에 깊이 중독되었다.
나라 빚을 갚느라 정작 학교, 병원, 치안 등 기본적인 공공서비스에 쓸 돈은 바닥이 났고 정부가 지출을 줄이려 하자 국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한번 늘린 복지는 줄일 수 없다’는 정서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정년을 62세로 겨우 올렸고, 마크롱 대통령이 격렬한 국민적 저항 속에서 64세로 연금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유세 폐지 등 정책적 실책이 겹치며 '부자들의 대통령'이라는 비판과 함께 사회적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했다.
화려한 파티 속에서 서서히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역사적으로 프랑스에서 거리는 시민들이 권력에 대항해 싸우는 민주주의의 무대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1968년 68혁명에 이르기까지 거리의 시위는 권력을 견제하는 능동적 시민의식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방화와 약탈, 폭력 사태는 이러한 위대한 전통에 치명적인 먹칠을 했다.
프랑스 당국은 극좌 무정부주의자나 외부 침투 세력, 기회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던 문화 대국의 위상과 명예는 이미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었다.
과거 특파원 시절, 필자는 프랑스를 보며 화려한 조명 아래서 서서히 침몰해가는 '타이타닉호'를 떠올리곤 했다.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라는 자부심, 유럽 문화를 선도한다는 우월감, 과거의 화려한 유산에 사로잡혀 샴페인을 터뜨리는데 몰두해있는 듯한 동안 프랑스의 모습은 마치 화려한 파티가 펼쳐지는 동안 서서히 침몰해가던 타이타닉호와 닮아 있었다.
오늘날 프랑스가 겪고 있는 비극은 ‘나라가 어떻게 되든 내 복지혜택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사회적 집단 이기주의에 무릎을 꿇은 포퓰리즘정치가 만들어낸 ‘예견된 침몰’이다.
달콤한 복지의 함정에 빠져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친 국가가 어떤 청구서를 받게 되는지, 오늘 프랑스의 아픈 현실은 우리에게도 명확하고 서늘한 경고를 던져준다.
*필자/이정옥.
KBS 전 파리특파원/KBS글로벌 센터장/한국방송협회 사무총장/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

